스콜라주의와 초기 그리스도교 : 상호작용과 발전
스콜라주의 시대에 그리스도교 학자들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특징과 가르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의 구속, 영적 구원, 축복된 미래 등 그리스도교적 토대 위에 세계와 삶에 대한 이론을 세웠다. 그들은 구원의 조건과 그리스도교와 고전 문화의 관계를 이해하고자 했다. 스콜라주의의 가장 중요한 측면 중 하나는 그리스도교의 도전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였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본성, 믿음과 이성의 관계, 하나님과 세상의 관계와 같은 문제가 포함되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학자들은 새로운 신조를 개발하고 그리스도교 사상의 기초가 될 교리 체계를 수립했다. 고전 철학과 그리스도교 신조의 형성이 상호 작용하는 것도 스콜라주의의 주요 특징이었다. 그리스도교 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과 같은 고전 철학자들의 작품을 연구하고 그들의 가르침을 교리와 조화시키려고 노력했다. 전반적으로 스콜라주의는 그리스도교와 세계에서의 그리스도교의 위치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려는 강렬한 지적 활동의 기간이었다. 그것은 오늘날까지 우리의 생각에 계속 영향을 미치는 많은 중요한 신학, 철학, 과학 저작물을 만들어 냈다.
스콜라주의 시대 - 그리스도교적 기반에 입각한 세계와 삶의 이론 구축
근본 교리가 확립되고 조직 교회로서 그리스도교가 성공을 거둔 후에, 교의에 의하여 주제와 지도 원리를 결정하는 철학적 정교화 작업에 헌신하는 철학적 구조물의 시그대가 시작되었다. 중세 철학의 가장 큰 부분을 형성하는 이 그리스도교 철학은 그리스도교 교의의 설명과 체계화와 증명, 그리고 그리스도교적 기반에 입각한 세계와 삶에 대한 이론의 구축을 그 목표로 삼았다. 이런 일을 수행한 사상가들을 일러 스콜라 학자라고 불렀으며, 그들의 체계를 스콜라철학이라고 불렀다. 이 스 /콜라철학은 교부들이 명확히 세운 그리스도교 교의에서 자신의 교리적 신념들을 도출했지만, 그리스 철학의 방법과 개념의 특징을 간직하는 철학적인 틀에서 그 신념들을 주조했다.
스콜라 학자들은 자신들이 직면한 문제들의 해결책을 얻기 위하여 그리스 철학에 의존했지만, 그들의 정신적 자세는 고대 사상가들의 그것과 달랐다. 그리스 철학자들의 목표는 대중 종교로부터 독립하여 우주에 대한 이성적 설명을 제시하는 것이었으며, 그래서 그들은 다소 과학적 정신으로 그 과제에 접근했다. 심지어 당시에 유력한 신념을 반대하는 정신으로 접근한 경우도 많았다. 반면에 스콜라 학자들은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 진리들은 그들의 사색을 위한 출발점과 규제 원리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를 이해할 수 있고 합리적인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이 일을 성취하기 위하여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에 가장 적합한 그리스 사상 체계에 의존했다. 그들에게는 철학이 종교를 봉사하는 것이었다. 철학은 신학의 시녀(ancilla theologiae)가 되었다.
그리스도교 교의에 의하여 설정된 한계 안에서, 지성은 그 솜씨를 발휘할 자유가 있었다. 인간 이성은 확립된 진리와 상충되지 않는 한, 세계를 마음대로 해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지성은 신학의 굴레에서 벗어나 정해진 영역 바깥으로 나가서 만족을 얻기 시작했다. 스콜라주의적 태도와 방법은 만족스럽지 못한 것으로 밝혀졌고, 그리스도 교 교의와 독립적인 토대에서 철학 체계를 수립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또한 스콜라주의의 전체 합리주의적 운동은 다른 측면에서 공격을 받았다. 교의와 전체 교회 제도가 비판을 받았고, 내면의 종교 생활은 성경과 개인의 양심에 호소하는 것에 의하여 변모되었다. 이론적 실천적 측면에서 그리스도교의 개혁은 근대의 두 서막,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특징과 가르침 -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의 구속, 영적 구원과 복된 미래 / 구원의 조건
헬레니즘적 사색의 마지막 시기 동안, 당대에 호감을 살 만한 많은 요소를 가진 새로운 종교가 로마 세계에서 회심자를 만들고 있었다. 유대교의 토양에서 등장한 이 종교는 자비로우시며 공의로우시며 모든 자녀를 동일하게 사랑하시며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의 구속을 약속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복음을 전파했다. 이 종교는, 구원받을 수 없을 만큼 비천한 사람이 없으며, 모든 사람에게 소망이 있으며, 그리스도가 자신의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다시 오실 것이며, 처음에는 땅에서 그다음에는 하늘에서 그 나라를 세우시겠지만 땅에서든 하늘에서든 그 나라는 의와 사랑의 나라가 될 것이라는 것을 가르쳤다. 그리고 심판날에 불의한 자는 아무리 부유하고 힘세다 해도 놀라게 될 것이며, 마음이 깨끗한 자는 아무리 가난하고 비천해도 영광에 들어갈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리스도교는 죄악된 세상에서의 구원과 복된 미래 생활을 약속할 때,
대중의 심금을 울렸고 당대의 갈구를 만족시켰다.
구원의 조건은 외적이며 우연적인 선에 의존하지 않고 덕스러운 생활, 회개, 하느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에 달려 있었다. 문자적인 율법 해석이라는 바리새주의적인 관념은, 그리스도교의 설립자에 의하여 영혼의 의(義)의 교리로 변모되었다. 사람들은 두려움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경외에서 행동해야 한다. 마음의 정결은 하느님이 보실 때 레위적 규례와 관행에 대한 외적 준수보다 유익하며, 내면의 영혼이 외면의 형식보다 더욱 값지다. 구원을 얻는 길은 오직 하나이며, 그것은 악한 정욕, 시기와 분노와 미움과 복수를 없애며, 자신을 미워하는 자조차 용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악을 행하는 것보다 차라리 해를 입는 편이 낫기 때문이다. 사랑과 용서는 마움과 복수를 대신한다. 모든 사람은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해야 하며, 모든 인류가 자신의 이웃이다.
그리스도교와 고전 문화
이런 정신적 일신교, 그리스도교의 내세관, 사랑의 복음, 고통당하시는 그리스도의 모범과 더불어, 이 새로운 종교는 로마 세계왕국에 호감을 풍겼다. 교양있는 계급에서 회심자들이 늘어나자, 이 종교는 침투해 들어가던 문화에 깊이 뿌리 박혀 있던 철학적 관념들을 무시할 수 없었다. 사실 팔레스타인에서 등장할 때의 그리스도교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나마 이 그리스·로마 문명을 힘입어 등장했다. 유대교는 대로마제국에 만연했던 윤리적·정치적·사회적·종교적·지적 영향을 거스를 수 없었고, 그리스도교적 저항은 부분적으로 이런 영향력의 산물이기도 했다.
시대가 무르익자 새로운 세계 종교가 그 모습을 나타냈다. 이 종교의 등장과 확산에 기여한 요인들 가운데에는, 보편적 제국이 존재함, 스토아주의가 큰 힘을 발휘하여 주입시킨 사해동포주의와 형제됨의 정신이 커져감, 철학자들이 가르쳤던 영적 신의 개념이 우세해짐, 대중적인 그리스 비교(秘敎)와 동양 종교의 영혼불멸론이 널리 받아들여짐, 형이상학자들의 추상적 개념들이 실패한 곳에서 종교적 정신을 각성시키는 데 성공한 유대교의 인격신의 이상이 영향을 끼침 등이 있었다.
그리스도교는 상당 부분 그 시대의 자녀였고, 유대교와 헬레니즘 로마문명의 소산이었다. 새로운 종교가 당대의 세계에 출현한 것과 동시에 당대의 영향이 중단된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도교는 그리스인과 로마인에게 자신을 알리기 위하여, 복된 소식을 전하는 그 세계의 문화에 점차 동화되었다. 이 새로운 종교에서 자신을 유대교의 한 단계로 보았던 유대인 그리스도교의 분파들이 승리했더라면, 그리스도교는 예루살렘의 담 아래 파묻혔을 것이다.
도전적인 문제 해결 / 새로운 신조 정의 / 교리의 체계 수립
그리스도교는 자신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하여 수많은 도전적인 문제를 풀어야 했다. 그리스도교는 자신의 신앙을 이성에 정당화하고, 그리스도교를 주목하게 되는 정치평론가들과 철학자들의 공격에 맞서 자신을 변호해야 했다.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입장에 서서 그들의 반대를 맞닥뜨리고, 그들에게 친숙한 철학적 개념을 사용하고,
자신들의 지적 무기 즉 자신들의 철학을 가지고 그들과 싸워야 했다. 그와 같은 신앙의 변호자들 즉 변증가들이 필요할 때 등장했다. 그러나 새로운 신조를 정의하고, 신조를 명확하게 수립하고, 교리 혹은 교의의 체계를 수립해야만 했다. 여기서 철학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전통적 신념을 합리적으로 표현하는 데 이바지했다. 그리하여 다시 한 번 그리스 사상이 그리스도교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교회의 위대한 공의회는 교의들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승리한 신조는 정통 신조가 되었고, 그것의 주창자들은 교부(敎父)가 되었다. 그들이 분명하게 세운 그리스도교 철학이 바로 교부 철학이다.
그리스도교 신조의 형성과 고전 철학의 상호작용
그리스도교 신조는 새로운 신념과 고전 철학의 상호 작용에서 생겼다. 교회가 당대의 세속 사회에서 이끌어낸 제도 형식으로 조직을 갖추었다는 점은 지적되어야 한다. 가령 주교는 지방 당국의 관리의 기능과 비슷한 기능을 시행했다. 교회는 주교들의 교회회의라는 형태로 통일된 행동 수단을 감독 제도에 부여했고, 권위 있는 사도적 전통에 그 제도를 정초 했다. 이 사도적 전통에서는 로마 감독의 지위가 이미 중심을 이루었다. 교회는 교회 설립자들과 관련된 많은 저술에서 성경 경전을 모았다. 그리고 마침내 교회는 자신의 철학이 아니라 자신의 신앙을 짧은 개요 혹은 신조로 공식화했다. 수세시(受洗時) 신자가 고백했던 신조(regula fidei)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신조는, 신자가 개인적인 사변적 성향에서 철학적 형식을 부여하게 될 때 그것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고수해야 할 교리를 구현했다. 그런 신조는 이미 3세기 로마 교회에서 하나의 전승이었다(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듯이 사도신경은 이 신조에서 나왔다). 이 신조는 한 분 하느님, 그의 독생자이며,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인간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표현했고, 육신의 부활이라는 교리로 전인에 대한 영원한 생명을 약속했다.
교회의 구원관은 개별 인간 영혼의 무한한 가치를 주장했고, 아울러 그리스도 안에서 만인이 사랑의 법 아래서 형제되었다는 느낌을 담고 있었다. 이로 인하여, 사람에 대한 사람의 행동을 규율하는 궁극적 기준으로 간주되는 국가가 도전을 받았고, 아울러 고전적 윤리 개념의 중심에 놓여 있던 이성의 이념도 도전을 받았다. 구원에 대한 교회의 관점은 국가와 고전적인 윤리적 개념에 도전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영혼과 형제애의 가치를 강조했다. 그러므로 아주 복잡한 종류의 반(反)세속주의가 초창기에 등장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 경향은 성 바울에게서 이미 표현되었다. 그에게는 이 세상의 지혜가 단지 어리석음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후에 순교자 유스티누스(이런 문제들에 대한 그의 관점은, 2세기에 플라톤주의로부터 회심한 자의 관점이었다)에게서, 그리고 제국의 모든 가치와 주장에 대한 테르툴리아누스의 공격에서 표현되었다. 이는 마침내 지상의 도성과 하느님의 도성을 나누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구분에서 절정에 이른다. 이 구분은 410년 로마의 약탈에 자극받아 이루어진 사색에서 나왔다.
우리의 주된 주장은, 그리스도인들은 그 신앙 때문에 고전 세계의 전제와 구도에서 독립을 달성하여 이성과 철학에 대한 비판적 태도로 이어졌다. 그래서 확신감을 갖고서 로마와 그리스의 유산에 맞닥뜨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중요한 전환점으로 여기는 3세기에, 테르툴리아누스는 국가와 역사와 자연에 대한 새로운 태도의 성취에서 믿음이 맡는 역할을 완벽하게 의식했다. 고전적 의미의 이성을 오류와 혼란과 이단의 원천으로 보는 그의 비판적 태도는 극단적이었으며, 다음과 같은 특징적인 선언으로 표현되었다. “하느님의 아들은 태어나셨다. 나는 그것이 부끄러운 일이기에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하느님의 아들이 돌아가셨다. 이성에게는 그것이 어리석기 때문에 확실하다. 그리고 그는 장사되었다가 다시 부활하셨다. 그것은 불가능하므로 확실하다.” 이는 그리스도교적 입장에 대한 논쟁적인 과정법이다. 그러나 이는 3세기에 신앙으로서 그리스도교의 관점으로 볼 때 고전주의는 인식론과 윤리학에서 파탄 상태였음을 우리에게 넌지시 보여준다.
신앙과 제도로서 그리스도교의 특징인 확신은 철학적 사변의 체계로서 그리스도교에 이르지 못한다. 종교를 당대의 유력한 철학의 용어로 표현하려는 그리스도교의 노력은 적어도 3세기에는 전체적으로 제도와 신앙으로 간주되는 교회보다 형편이 훨씬 좋지 못했다. 2세기 변증가들이 시작한 사변적 활동은 최초의 그리스도교 대이단 즉 영지주의 이단과 싸우는 과정에서 가장 힘든 시험을 통과했다. 3세기 테르툴리아누스 시대 때 사변적 활동의 대표자는 알렉산드리아 교리문답학파의 클레멘스와 오리게네스였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216년에 죽음)는 그 학파의 맨 처음 우두머리였다. 그를 이은 오리게네스(185-254년)는 아마 3세기 그리스도교와 철학의 관계를 예시하는 가장 중요한 인물일 것이었다.
하지만 신플라톤주의를 명확한 형태로 제시한 플로티노스(204-289년)의 세기였음을 잊어버리면, 그 시대의 분위기에 대한 명확한 개념을 형성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철학의 경향들이 그 시대의 철학적 분위기를 지배하며 특별히 신플라톤주의의 창설자이며 플로티노스의 스승인 암모니우스 사카스의 학교를 상당 기간 다녔던 오리게네스의 작품에서 특별히 명백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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