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철학의 탄생 - 교부 시대
그리스도교 초기 시기, 즉 대략 2세기부터 8세기까지 이어진 교부 시대는 중세 철학의 탄생과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이 시기는 그리스도교 교리와 교회 조직의 형성, 교리서와 서적의 생산과 전파 등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시기였으며, 이러한 활동들이 그리스도교의 철학적 발전과 중세 철학의 기초를 이루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교부 시대의 철학적 사고는 그리스도교 교리와 철학의 융합에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융합으로 탄생한 철학적 사고는 이전의 그리스 철학과는 차별화된 그리스도교적 철학이 되었으며, 이는 중세 철학의 기반이 되었다.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이슈인 니케아 공의회는 이후 그리스도교 교리에 대한 공식적인 정립과 통일을 이루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 공의회는 그리스도교의 핵심 이슈였던 아리우스 주의를 반박하고, 아버지와 아들이 동등한 신격으로 세계를 창조하셨다는 교리를 공식화했다. 테일러의 중세적 정신은 중세 철학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인 종교성에 대한 집착을 지닌 철학적 사고이다. 이는 그리스도교적 가르침이 철학적 사고에 깊은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이다. 교부 시대의 특징과 철학적 사고, 니케아 공의회, 그리고 테일러의 중세적 정신에 대해 더욱 상세하게 다룰 것이다. 이를 통해 중세 철학의 탄생과 발전에 대해 전문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중세의 시기 결정 - 로마 제국의 쇠퇴, 그리스도교, 서유럽 철학
서기 529년 유스티니아누스의 칙령으로 아테네의 아카데미가 폐교된 것을 고대 철학의 공식적인 종언 시점으로 보고 그때까지의 고대 철학을 공부했다. 이제 우리는 발걸음을 돌이킬 필요를 발견한다. 왜냐하면 로마 제국과 그리스·로마 철학 혹은 헬레니즘 철학의 쇠퇴를 표시하는 그리스도교 시대의 초창기는 또한 새로운 그리스도교가 하나의 교리로서 그리고 하나의 제도로서 수립된 시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제 고찰할 시대에 서유럽의 지성 생활을 지배하는 것은 무엇보다 그리스도교이다.
중세 철학에 대한 우리의 연구는 로마 교회와 연관된 그리스도교 철학만을 주로 다룰 것이다. 동로마 제국의 비잔틴 문명에서 발생하는 아랍과 유대의 철학은 다소 덜 자세하게 공부할 것인데, 서유럽의 철학에 미친 그 영향력을 중요하게 다룰 것이다. 역사가들은 종종 연구 재료를 다루기에 편리한 대로 중세의 시기를 결정할 수 있음을 발견하고, 때때로 중세를 테오도시우스의 사망 때 제국이 그 아들들에게 분할된 주후 395년부터 콘스탄티노플이 투르크족에게 점령당한 1453년까지의 시기로 규정하곤 했다. 395년은 우리의 목적에 비추어 볼 때 고대 세계의 활력이 쇠퇴한 것을 표시하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처럼 이른 연대에 중세라는 말과 동일시되는 많은 특징을 식별해 내지 못한다.
테일러, 중세 정신의 특색 - 라틴계 민족, 그리스와 로마세계의 문화, 라틴 형태의 그리스도교
테일러(H. O. Taylor)는 이 말을 시대보다 문명을 지칭하는 데 사용하면서, 중세 정신의 특색을 세 가지 상호 작용하는 요소로 추적해 들어간다.
(1) 쇠퇴기의 로마 제국을 파괴한 북부 야만족들과 서유럽에 이미 존재했던 라틴계 민족들이 혼합하여 생긴 새로운 민족들의 기질
(2) 일차적으로 라틴적 출처에서 전달된 그리스와 그리스·로마 세계의 문화
(3) 동방(그리스) 형태보다 라틴 형태의 그리스도교
그는 이와 같은 융화가 8세기 전에 대규모로 발생하는 증거를 거의 발견하지 못하며, 따라서 교황 대(大) 그레고리우스(590-604년)조차도 교부 시대와 중세 시대의 매개자로 생각한다. 우리는 이 요점을 내세울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중세적 관심이든지 어떤 역사적 관심이든 그것이 규정되는 대로 시기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당면 관심사는, 395년보다 오래전부터 논의를 시작하라고 요구한다. 이는 중세 철학의 전제와 발전을 분명하게 밝히기 위함이다.
교부 시대 (그리스도 시대 ~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망) - 중세 철학의 서두
그러므로 우리는 교부 철학을 엄밀한 의미의 중세 철학의 서두로서 다루어야 한다. 적어도 정신의 문제에서 풍부함과 약속의 시대였던 교부 시대는 아무리 편협한 해석을 따르더라도 그리스도의 시대로부터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망 때(430년)까지 펼쳐져 있다. 가장 광범위하게 해석하면, 그 시기는 심지어 692년 트룰로(Trullo) 공의회 때까지 지속되는 그리스도교 교의의 심화 발전기를 포함했다. 교부 철학은 엄밀한 의미의 중세와 구분되고 우리가 이미 다루었던 비그리스도교적인 헬레니즘 철학과도 구별되는 철학사의 한 국면으로 다룰 가치가 있다. 초기 그리스도교와 헬레니즘 철학의 혼융으로 생겨난 교부 시대는 철학보다 신학에서 더 풍성하다. 교부 철학의 가장 위대한 대표자이며 아마 철학자라는 칭호를 취할 자격이
완벽한 유일한 인물인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철학의 직계 후계자를 두지 않았지만, 명백한 중세 시대의 상당히 후반기에 이르러 마땅한 명성을 얻는다. 이 단락에서 우리는 교부 시대의 중요한 윤곽만을 간략하게 다룰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교적 요소와 그리스 철학에서 나오는 요소들의 상호 작용을 좀 더 분명하게 식별하기 위함이다.
초기 그리스도교와 헬레니즘 철학의 혼융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은 유형이 아주 다양했지만, 대체로 이방인 유형과 여전히 유대교 지향적인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아주 초창기에 그리고 복잡하고 모호한 방식으로, 헬레니즘적 그리스도교라고 불리며 성 바울이 예시해 주는 그런 그리스도교가 이 두 원천에서 등장했다. 교부 시대는 초기 그리스도교와 헬레니즘 철학의 혼융으로 생겨난 시대이다. 새로운 종교는 평범한 사람의 정서와 식자층의 지성에 공히 알맞는 형태로 자신의 교의를 표명하고 고대 세계에 만연한 이교적·유대교적 교리와 자신을 차별화하려 했다.
성 바울, 교부 철학의 특징
성 바울의 저술들(특별히 히브리서)에서 그리고 요한복음에서 교부 철학의 두 가지 특징을 이미 식별할 수 있다.
첫째로, 하느님의 성육신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높임
둘째로, 당시 헬레니즘 세계에 지배적이던 철학적 개념으로 그리스도의 인격을 해석함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본성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이해는 철학적 사변과 합쳐질 때까지는 명확한 형태를 취하지 못했다.
성 바울의 저술에서 표현된 것처럼, 그것은 삼위일체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인성과 신성의 연합이라는 후대의 교리의 씨앗만을 담고 있다. 게다가 바울의 교리는 니케아 공의회 이전의 논쟁들에 의하여 잘 입증된, 최종적으로 수용된 교리와 상이한 표현을 이미 담고 있었다. 서양 그리스도교의 전체 신학이 궁극적으로 근거를 두는 삼위일체 교리는 325년
니케아 공의회 때에 이르러 명확한 형식을 얻었다. 이는, 아리우스주의자와 아타나시우스의 추종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삼위일체 논쟁이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해결될 때까지,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의 관계에 관한 이후의 논쟁이 적어도 서방에서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종결될 때까지 새로운 교회를 위한 확고하고 공인된 기초로서 수립되지 않았다.
이런 전개 과정에 앞서서 상당한 신학적 논쟁이 일었는데, 당시 헬레니즘 세계에서 통용되던 철학 용어가 사용되었다. 이 용어는 대체로 니케아 이전 시대에 플라톤적 그리스도교적 철학의 용어이며, 대체로 필론에서 유래하는 신플라톤주의적 전통에 속한다. 스토아주의적 요소와 아리스토텔레스적 요소도 초기 그리스도교 사상에 존재하지만, 신플라톤주의적 요소가 지배적이다. 이 시대의 그리스도교 철학은 그리스도교 요소가 헬레니즘 철학에 동화되어 자신의 구별되고 독특한
특색을 많이 상실한 반면 헬레니즘적 요소들은 별다른 변천을 겪지 않았다는 인상을 때때로 준다. 이런 인상은 니케아 이전 대부분의 철학에 해당한다. 이 철학은 동방의 그리스에 본거지를 두었다. 무엇보다 오리게네스(254년에 죽음)에게 해당된다. 그는 클레멘트를 이어 알렉산드리아 그리스도교 학파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니케아 공의회 - 그리스도론적 논쟁 / 그리스도에 대한 공식적 정의 수립 /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 형성 무대 마련
니케아 공의회(325년)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들로 서술하고 동시에 참으로 성육신한 하느님이라고 서술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개념의 공식을 만들었을 때 신플라톤주의로부터 돌이켰다. 이는 그리스도교 신플라톤주의의 로고스 이론과는 대립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 신플라톤주의는 방출의 원리에 의하여 그리스도와 동일시되는 로고스를 초월적 하느님과 감각적 사물의 세계의 중보자인 일종의 제2의 신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니케아의 정의(定義)는 알렉산드리아의 장로 아리우스의 이단을 구체적으로 배격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이 이단의 철학적 선배는 필론, 오리게네스, 신플라톤주의자들이었다. 공의회의 의사 진행 과정에서 알렉산드리아 교회회의에 의한 아리우스의 면직이 추인되었고, 그의 가르침이 정죄받았다. 니케아의 정의는 그리스도인들이 견지해야 하는 신앙의 의미를 수립했으며, 그 옹호자들은 철학적 혹은 신학적 사변보다 자신들이 이해하는 성경에 의존했다. 아리우스주의자들과 더불어 다년간 논쟁을 벌이면서 니케아의 공식에 좀 더 철학적인 성격을 부여한 것은 아타나시우스였다. 그는 부제로서 니케아에 참석했으며, 328년에 알렉산더를 이어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직에 올랐다. 아타나시우스는 삼위일체의 제3위이신 성령을 포함하여 니케아의 정의를 완성했고, 참으로 철학적인 교리의 출발점이 되는 정의를 달성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진정한 그리스도교 철학을 형성하도록 무대를 마련했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은 헬레니즘과 고전 그리스의 전문용어를 사용하되, 거기에 굴복하지는 않았다.
교부 철학의 중세적 종합의 재료로서 그리스도교적 요소와 철학적 전통의 결합
4세기는 새로운 교회의 교리 생활에서나 제국의 정치 생활에서 격동의 시절이었지만, 제국의 대부분이 고스란히 남아 있던 시기였다. 그러나 바로 그 세기의 말엽에, 형국은 변하기 시작했다. 테오도시우스가 죽은 395년은 참으로 로마 제국 전체가 정당하게 효과적이며 통일적인 통치 아래 속한 마지막 해라고 종종 인용된다. 그 후 그의 두 아들 호노리우스와 아르카디우스의 상속과 더불어 동방과 서방이 제갈길로 간다. 중세 그리스도교 철학의 발전 무대였던 서방에서는 게르만 침입자들의 사령관들이 시행한 통치를 제외하면 실질상의 통치는 존재하지 않았다. 392년에 즉 테오도시우스는 죽기 꼭 삼 년 전에 그리스도교를 자신의 나라의 공식 종교, 로 선언했다. 이 그리스도교는 니케아 이후 불굴의 아타나시우스가 그 정통적 형식에서 아주 열정적으로 옹호했고 아주 섬세하게 설명했던 그리스도교였다.
혼란의 5세기에 그리스도교는 서로마제국의 부요로운 그리스·로마의 유산을 지닌 유일한 기관이었으며, 현재 성숙하고 자의식적인 그리스도교 교의로 변모한 고전적 전통을 북부 침략자들에게 넘겨주는 근본 세력이 되었다. 그리스도교적 요소와 그리스·로마의 철학적 전통에서 비롯된 요소를 결합한 교부 철학은 스콜라주의 시대 동안 달성된 중세적 종합의 재료를 공급했으며, 그리하여 중세 서유럽 문명의 양상을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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