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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철학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본질과 논리: 유기적 철학, 과학적 추론, 그리고 경험의 의미

by 건강맨이야Ho 2023.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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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본질과 논리/ 이번 포스트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대해 다뤄보고자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 체계의 모순을 지적하며 유기적이고 목적론적인 철학을 제시했다. 그의 논리학은 과학적 진리의 엄격한 규정과 추론의 타당성 분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삼단논법을 중심으로 다양한 개념을 제시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본질 범주를 통해 근본적이고 독립적인 술어를 제시하며, 경험의 대상과 의미를 다루는 등 철학의 핵심 개념을 다루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철학의 본질과 논리가 무엇인지 그리고 경험 등에 대해서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려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문제와 플라톤 체계의 모순

플라톤 체계의 모순


플라톤은 포괄적인 규모로 관념론 철학을 구축한 그리스 최초의 사상가였다. 하지만 그의 체계는, 고찰하여 가능한 한 극복해야 할 난점과 모순을 제시했다. 초기 플라톤의 학교는 설립자 플라톤의 사상을 거의 발전시키지 못했다. 학파들이 일반적으로 그러듯이, 초기 학파는 자신들이 받은 대로 그의 이론을 아주 개괄적으로 전달했다. 그 체계를 재구축하고 자신이 보기에 좀 더 일관되고 과학적 방법으로 발전시키는 일은 독립적인 정신을 가진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몫이었다.무엇보다 초월적 이데아의 문제가 다시 고찰되어야 했다.플라톤은 영원한 형상을 실제 경험 세계와 구별하고 실제 경험 세계를 단순한 현상으로 낮추기 위하여 영원한 형상(아리스토텔레스는 그렇게 부른다)을 별들 너머에 두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제2요소 즉 플라톤의 질료라는 개념은 만족스러운 설명 원리가 되기 위하여 좀 더 엄밀하게 정의되어야 했다. 형상과 질료의 간격은 좌우간 가교되어야 했다. 어떻게 멀리 떨어져 있고 변화 없는 이데아가 생명 없고 비이성적인 기체(基體)에 자신의 흔적을 남길 수 있었는가? 다른 난점들도 제시되었다. 우리는 사물들의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형상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개인의 불멸적 영혼의 존재와 그것이 인간 신체에 있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데미우르고스와 세계혼은 임시방편이다. 신화와 대중 종교에 의존한다는 것은 무지의 고백이다. 이데아와 사물의 근본적 이원론은 남아 있으며, 그 체계의 모든 국면에 영향을 미친다. 적어도 플라톤의 제자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문제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의 이데아적 원리인 변화 없는 영원한 형상을 유지하지만, 그 원리들의 초월성을 거부한다. 말하자면 그는 그것들을 하늘에서 땅으로 가지고 온다. 형상은 사물들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 내재되어 있다. 그것들은 초월적이지 않고 내재적이다. 질료는 비존재와 동일시되어서는 안 되며 역동적 존재이다. 형상과 질료는 분리되지 않고 영원히 결합되어 있다. 질료는 개별 사물을 형성하기 위하여 형상과 결합하며, 각각의 사물은 형상의 통제와 지도에 따라 움직이고 변화하거나 자라거나 발전한다. 감각의 세계, 현상의 질서는 실제 세계의 단순한 모방 혹은 그림자가 아니다. 그것은 참으로 실제 세계이며, 하나를 이룬 형상과 질료이며, 학문의 참된 대상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실재론적 방식으로 학문 영역을 파악하므로, 학문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동정적으로 학문을 연구하며, 그의 이론은 학문과 언제나 긴밀한 접촉을 유지하며, 그는 자연과학을 장려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유기적이고 목적론적 철학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의 유기적·목적론적 전제를 받아들인다. 우주는 이상적 세계이며, 상호 관련된 부분들의 유기적 전체이며, 영원하고 변할 수 없는 이데아 혹은 형상의 체계이다. 이들은 사물의 궁극적 본질과 원인이며, 사물들을 현재의 사물들로 만드는 지도적 세력 혹은 목적이다. 하지만 이데아는 우리가 지각하는 세계와 격리되지 않고 그 세계의 일부와 부분이며, 그 안에 내재한다. 이데아들은 그 세계에 형식과 생명을 준다. 우리의 경험 세계는 믿을 수 없는 현상이 아니라 우리가 연구하고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실재이다. 경험은 지식의 기초이다. 우리는 경험에서 출발하여 궁극적 원리의 학문에 도달한다. 이런 실재 개념은 구체적이며 개별적인 것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중심과 조화를 이루며, 자연과학에 대한 그의 관심을 설명하며, 그의 방법을 규정한다. 하지만 진정한 지식은 단순한 사실 지식에 있지 않고 그것들의 이유나 원인을 인식하는 데 있으며, 그것들이 현재와 달리 존재할 수 없는지 이유를 인식하는 데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의 특징과 기능: 과학적 진리의 엄격한 규정, 추론의 타당성 분석



논리학의 창안은 어떤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가장 놀라운 업적이다. 인간의 지적 추구의 전체 역사에서 한 사람의 사상가가 새로운 학문을 완성시킨 경우는 유례가 없다. 사실 제논의 변증법적 논거, 소피스트들의 정교함, 소크라테스의 개념 정의 방법, 플라톤의 변증법에서 논리학적 이론이 선을 보였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타당한 추론 형태에 대한 학문적 연구라는 의미에서 논리학의 진정한 설립자이며, 논리학을 상세하게 만들고 개별 분과로 만든 최초의 인물이라는 것을 부인한 사람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조직화한 논리학은 거의 의심할 나위 없이 후대의 사상을 지배했다. 현대에 전통 논리학에 반란을 일으킨 중요한 사건은 두 번뿐이다. 첫 번째는 프랜시스 베이컨이 추론 방법을 옹호하며 주도한 것이다. 두 번째는 수리 논리학자들이 오늘날 수행하는 것이다. 이 두 번의 경우를 제외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은 이천 년이 넘도록 인간의 사고를 좌지우지했다.

논리학의 기능은 지식을 획득하는 방법을 서술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학을 참된 지식의 획득을 위한 중요한 도구로 보며, 우리가 논리적 사유의 원리에 친숙한 다음에야 제일 철학, 즉 사물의 본질의 학문에 대한 연구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논리학은 준비 학문이다. 좀 더 전문적인 표현을 사용하면, 예비 학문이다. 논리학은 모든 지식의 추구에 사용되는 방법의 정교한 설명이며 따라서 모든 개별 탐구에 선행된다. 이런 의미에서 논리학은 “학문들의 학문”이라고 서술할 수 있다. 논리학은 물리학, 생물학, 정치학과 나란히 학문 가운데 하나일 뿐만 아니라, 모든 학문을 위하여 필수적인 예비 학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논리학을 지식의 모든 분야에 응용할 수 있는 과학적 조사의 수단 혹은 도구라고 보았다. 여기서 그의 논리학이 갖는 대체적인 특징을 서술해 보자.

논리학의 주제는 사유의 형식과 내용에 대한 분석이며, 우리가 지식에 도달하는 과정에 대한 분석이다. 이는 올바른 사유의 학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은 참된 과학적 지식의 전제 조건을 엄밀하게 규정한다. 과학적 진리는 엄격한 필연성이 특징이다. 그의 말을 빌리면, 과학적 진리는 “현재와 달리 될 수 없는 무엇”이다. 과학적 명제를 수립하려면, 진상이 그러그러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충분하지 못하다. 그것이 달리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둘 더하기 셋은 다섯이다”와 같은 산수 명제는 모든 과학적 진리의 원형이다. 이것이 오류라는 것은 문자 그대로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반대로 백조는 희다든지, 불은 열을 만든다든지 하는 진술은 참되지 않은 것으로 증명될 수도 있다. 이는 우연적인 혹은 불확실한 판단이다. 그래서 학문의 영역에서 배제되어야 한다. 사유는 추론 혹은 과학적 증명에, 구체적인 것을 보편적인 것에서 도출하고 조건 지워진 것을 그 원인으로부터 도출하는 데 있다. 추리는 언어로 표현될 때 명제라고 불리는 판단으로 구성되며, 판단은 용어라고 표현되는 개념으로 구성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개념과 판단의 본질과 관계, 그리고 삼단논법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서 철저히 연구되지 않지만 그는 용어와 그것들의 정의와 관련하여 개념을 다루며, 최고의 개념 혹은 범주를 다룰 때 또한 그렇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일차적 관심은, 판단 혹은 명제의 논리에 있다. 그는 판단의 본질과 상이한 종류들, 그것들이 서로 간에 맺는 다양한 관계, 상이한 종류의 증명에 관하여 논의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증명의 본질을 상세히 다룬다. 즉 시초의 진리로부터 파생되는 명제들을 상세히 설명하는 과정 말이다.
그의 증명 혹은 연역은 언제나 하나의 삼단논법 혹은 일련의 삼단논법의 형태를 취한다. 그는 모든 사유가 움직이는 기본 형태를 삼단논법에서 발견하고 그 이름을 부여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삼단논법은 어떤 전제로부터 새로운 것(결론)이 필연적으로 나오는 담론이다. 이는 두 개의 전제(소위 대전제와 소전제)와 하나의 결론으로 구성된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라고 하는 표준적 삼단논법에서,“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대전제이고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는 소전제이며, 그래서 이 둘이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는 결론을 가능하게 만든다.
삼단논법에서 개별적인 것은 보편적인 것에서 도출된다. 그래서 이는 연역 추리의 한 형식이다.

참으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삼단논법은 모든 연역을 환원할 수 있는 형태이다. 그러므로 타당한 혹은 과학적인 증명은 언제나 삼단논법의 형태로 되어 있다: 이 증명은 삼단논법적이며 연역적이다. 결론이 참되려면, 전제에서 필연적으로 나와야 한다. 그리고 전제들은 보편적이며 필연적이어야 한다. 그래서 그것들은 입증되어야 한다. 즉 다른 전제에 근거해야 한다.
지식의 목표는 완전한 증명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에 이상적인 학문은 수학이었고, 수학을 모델로 사용한 것은 그의 논리학에서 연역이 중요한 역할을 맡았음을 설명해 준다. 그의 목표는 수학의 증명적 확실성을 다른 학문들에서 획득하는 것이었다. 이는 결론이 전제들에 의존하고 이 전제들이 다른 전제들의 결론을 이루는 일련의 삼단논법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이 과정은 영원히 진행될 수 없다. 우리는 더 이상 연역적으로 증명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절대적 확실성을 갖고 있는 명제 혹은 원리에 도달해야 한다. 그래서 과학적 지식의 체계는 증명을 허용하지도 요구하지도 않는 어떤 공리 혹은 기본 진리에 의존한다. 그것들은 모든 진리의 기초이며, 그 자체로 증명 불가능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질 범주: 근본적, 독립적 술어 / 경험의 대상과 그 의미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실체'이며, 이는 궁극적인 것이며 다른 모든 사물로부터 독립적인 것인 반면 나머지 다른 사물들은 실체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오직 개별자만이 그렇게 정의된 실체의 요구 조건에 따른다; 사멸성은 개별 인간의, 가령 소크라테스의 술어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다른 어떤 것의 술어가 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범주는 어떤 것에 주장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이며 보편적인 술어를 뜻한다. 그는 그런 범주를 열 개 혹은 때로는 여덟 개만 나열한다. 우리는 한 사물에 대하여, 그것이 무엇인가(인간: 실체), 그것이 어떻게 형성되는가(흰: 성질), 얼마나 큰가(길이 2야드: 분량), 어떤 관계에 있는 가(좀 더 큰, 두 배: 관계), 어디 있는가(리케이온: 공간), 언제(어제: 시간), 어떤 위치를 취하는가(누워 있다, 앉아 있다: 위치), 어떤 상태에 있는가(무장한: 상태), 무엇을 행하는가(탄다: 능동), 어떤 일을 당하는가(태워진다: 수동)를 말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경험의 대상들이 시간과 장소 안에 존재하며, 측량되고 계수될 수 있으며, 다른 사물과 관계를 맺고 있으며, 능동적이며 피동적이고, 본질적 성질과 우연적 성질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지각 가능한 개별 실체는 이 모든 범주의 담지자이며, 그것들은 모두 술어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실체 범주는 가장 중요한 것이며, 다른 것들은 실체의 술어가 될 수 있는 한에서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학문은 존재 혹은 본질 혹은 실체의 범주, 사물의 본질적 구성을 다루며, 따라서 논리학에서 형이상학으로의 이행이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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