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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철학

소크라테스 철학적 분석 방법, 윤리학, 키레네학파, 견유학파

by 건강맨이야Ho 2023. 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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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철학적 분석 방법은 귀납법과 연역법을 개념을 습득하는 회의적이고 대화적인 접근 방식을 포함하는 철학적 분석 방법으로 유명했다.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접근 방법은 진리와 수용된 지혜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론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는 대화 상대의 가정에 도전하고 그들의 믿음에 모순이 있음을 폭로하려고 했다. 이 회의주의는 그가 가정에 의문을 제기하고 추상적 개념에 대한 이해에서 명확성을 찾을 수 있게 했기 때문에 그의 철학적 탐구 방법의 중심이었다. 주로 소크라테스와 대화 상대 사이의 앞뒤 교환을 포함하는 대화식이었다. 그는 대화 상대가 자신의 생각을 명확히 하고 다듬도록 격려하는 수단으로 질문을 사용했다. 이 대화식 접근 방식은 대화 상대의 믿음에 있는 모순과 불일치를 밝히는 방법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정의, 용기, 지혜와 같은 추상적인 개념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얻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는 이러한 개념의 본질적인 특징을 알아내고 관련되거나 중복되는 생각과 구별하는 방법으로 질문을 사용했다. 소크라테스는 명확한 개념을 습득하는 것이 세상과 우리 자신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를 발전시키는 데 필수적이라고 믿었다. 소크라테스의 방법은 귀납적 추론을 포함하며, 특정 예와 사례를 기반으로 추상적인 개념에 대한 일반적인 결론을 도출한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는 정의, 용기, 지혜의 구체적인 예를 검토함으로써 이러한 개념을 보다 일반적으로 이해하려고 했다. 소크라테스는 또한 대화 상대의 주장의 논리적 일관성을 테스트하기 위해 연역적 추론을 사용했다. 그는 종종 그들의 주장이 암시하는 바를 끌어내고 논리적 원리를 사용하여 그러한 주장이 다른 신념이나 가정과 일치하는지 여부를 결정했다. 연역적 추론을 사용함으로써 그는 대담자들의 논증의 논리적 건전성을 테스트하고 그들의 추론에서 불일치와 오류를 드러낼 수 있었다. 그의 접근 방식은 경험적 관찰과 경험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우리의 가정과 믿음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통해 근본적인 진실을 밝히는 것을 목표로 했다.

소크라테스적 방법 - 철학적 분석 방법의 특징 : 회의론적, 대화, 개념획득적, 귀납적


소크라테스는 한 주제를 토론할 때, 일반적으로 일행의 통속적이고 성급히 형성한 의견들로부터 출발한다. 그는 일상생활에서 취한 예화를 사용하여 이 의견들을 검토하고, 필요할 경우 그것들이 확고한 기초에 서 있지 않고 수정과 교정의 필요가 있음을 보인다. 그는 적절한 경우를 제시함으로써 대화에 참여한 자들이 스스로 올바른 견해를 형성하도록 돕고, 진리가 차례차례 발전할 때까지 만족하지 않는다. 크세노폰의 유명한 예는 소크라테스적 방법의 본질적 특징을 분명하게 보여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능숙한 질문으로, 에우티데모스라는 청년으로 하여금 위대한 정치가가 되려는 야심을 실토하게 한다. 그런 다음 소크라테스는 그가 야심을 추구하기 위하여 자연스럽게 정의로운 사람이 되려고 해야 한다고 그에게 넌지시 말한다. 청년은 자신이 이미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식으로 소크라테스는 귀납에 의하여 정의를 발전시킨다. 먼저 예를 사용하여, 임시적인 정의를 형성한다. 이 정의를 다른 예를 사용하여 검토하고, 마지막으로 만족스러운 정의에 도달할 때까지 필요 조건을 만족시키도록 처음의 정의를 확대하거나 축소한다. 프랜시스 베이컨이 훗날 명명했던 “부정적 사례” 즉 제시된 전통적 정의에 모순되는 사례가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그 목표는 언제나 정의하려는 주제의 본질적 특징을 발견하고, 명석판명한 관념이나 개념에 도달하는 것이다. 때때로 소크라테스는 언급된 진술들을 올바르다고 가정되는 기본 정의에 비추어 비판함으로써, 곧장 제일 원리로 돌아감으로써 언급된 진술들을 검토한다. 이 방법은 연역적이다. 가령 당신은, 이 사람이 저 사람보다 훌륭한 시민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당신의 주장은 단순히 주관적 의견으로, 받아들일 만한 정의를 언급하여 그것을 지지할 이유를 제시하지 않으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 사람이 훌륭한 시민인지 아닌지에 대한 질문은, 당신이 훌륭한 시민이 누구인지를 알 경우에만, 엄밀하게 용어를 정의한 경우에만 판정될 수 있다.

그러면 지식은 결국 가능하지만, 우리가 적절한 방법을 따를 때에만 그렇다. 우리는 용어를 정확하게 정의하고, 제일 원리로 추론을 끌고 가야 한다. 지식은 일반적이며 대표적인 것에 관심을 갖지 개별적이고 우연적인 데 관심을 갖지 않는다. 소피스트는 이 점을 이해하지 못했고,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똑바로 세운다. 하지만 그는 한 가지 중요한 점에서 소피스트들과 의견을 같이한다: 그는 우주론적 형이상학적 사변의 무익성에 대한 신념을 그들과 공유했다. “참으로 그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우주의 본질과 같이 어려운 문제에 관한 모든 토론에 고개를 돌린다. 학자들이 표현하듯이 ‘우주’가 어떻게 생성하였는가, 혹은 어떤 세력에 의하여 천상 현상이 발생했는가 하는 문제 말이다. 그는 그런 문제로 우리의 머리를 골치 아프게 만드는 것은 바보짓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관심은 윤리적 실천적인 것이었으며, 그는 그런 사색의 결과가 어떻게 될는지 생각하지 않았다. 소크라테스적 방법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방법론자가 아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는 철학적 탐구에 대한 자신의 방법을 명확하게 서술하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런 방법론적 과제를 설명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하나의 방법을 실천했고, 그의 사유는 철학적 절차의 한 패턴을 너무 훌륭하게 보여주므로, 그가 그 절차의 성격과 중요한 수단을 전혀 몰랐다고 믿기란 어렵다. 소크라테스가 철학적 분석에서 사용한 방법은 다섯 가지 쉽게 구분 가능한 특징을 갖고 있다.


(1) 그의 방법은 회의론적이다.

그것은 토론중인 문제에 관하여 알지 못한다는 소크라테스의 참된 혹은 거짓된 무지로부터 시작된다. 이는 청중에게 진실치 못한 거짓말로 보이지만 소크라테스의 참된 지적 겸손을 보여주는 하나의 표현임에 틀림없는 소크라테스의 반어법이다. 소크라테스는 이 회의론을 소피스트들과 공유했으며, 그것을 채택하면서 아주 당연히 그들에게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소피스트들의 회의론은 결정적이며 최종적인 데 비해, 소크라테스의 회의론은 임시적이며 잠정적이다. 소크라테스의 회의와 가장된 무지는 데카르트의 시초적 회의와 마찬가지로 지식 추구의 필수적인 첫 단계이다.

(2) 그것은 대화이다.

그의 방법은 대화를 교훈적 장치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진리 발견을 위한 기술로 사용한다. 사람들의 다양한 의견 가운데서도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진리가 있다는 확고한 확신을 갖고서, 소크라테스는 토론 혹은 질의응답에 의하여 그런 진리를 열어 보이기 시작한다. 소크라테스는 일행 가운데 한 사람이 제시한, 혹은 시인(詩人)이나 다른 전통적 원천에서 취한 대중적 혹은 성급히 만든 개념에서 출발하여, 이 개념을 엄격하게 비판한다. 그러면 그 결과 좀 더 적절한 개념이 등장한다. 이런 측면에서 그의 방법은 종종 산파술적 방법으로 서술된다. 이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태어나게 하는 지적 산파의 기술이다.

(3) 개념 획득적 혹은 정의(定義) 획득적이다.

방법은 정의, 신앙, 지혜, 용기 등과 같은 윤리적 개념의 정확한 정의를 획득하는 것을 지식의 목표로 설정하므로 소크라테스는 진리가 정확한 정의(定義)에 있다고 암묵적으로 가정한다. 이 가정은 분명히 견고한 게 아니다. 정확한 정의는 의심할 나위 없이 지식에 필수적이지만, 정의만으로 지식을 형성할 수 있는 건 아니다.

(4) 경험적 혹은 귀납적이다.

소크라테스의 방법은 구체적 사례를 언급하여 제시된 정의를 비판하므로 경험적 혹은 귀납적이다. 소크라테스는 일반적 경험과 일반적 관례에 호소함으로써 정의를 테스트한다.

(5) 연역적이기도 하다.

이 방법은 정의의 함축 의미를 끌어냄으로써, 그 결과를 연역함으로써 정의를 테스트하므로 연역적이기도 하다. 소크라테스의 정의 획득적 방법은 철학적 탐구의 논리에 참으로 기여했다. 이 방법은 플라톤의 변증법적 방법에 영감을 불러일으켰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소크라테스의 윤리학 - 최고선은 무엇인가? , 지식은 덕의 필요 충분 조건

지식, 명확하고 추론된 사유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신념은 강하다. 너무 강한 나머지, 그는 우리의 모든 병에 대한 치료약을 거기서 발견한다. 그는 자신의 방법을 인간의 모든 문제에, 특별히 도덕의 문제에 적용한다. 그래서 행동을 위한 합리적 기초를 발견하려 한다. 급진적 사상가들인 소피스트들은 당대의 윤리적 이념과 관행을 단지 인습으로 보았다. 결국 힘이 정의를 만든다는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은 당대의 윤리적 이념과 관행을 자명한 것으로 본다. 행동의 규칙은 사람이 추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준수해야 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도덕의 의미를 이해하고, 옳고 그름의 합리적 원리를 발견하려 한다. 이 원리는 도덕적 문제를 판단하는 기준이다. 그의 생각에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것이다: “나는 어떻게 나의 삶을 정돈할 것인가? 합리적인 생활 방식은 무엇인가?
추론적 존재인 인간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소피스트들은 나를, 특정한 나를 즐겁게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나에게 옳으며, 보편적 선이란 없다는 의미에서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고 말하는데, 그것이 옳을 리는 없다.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 틀림없이 문제에 있다. 모든 합리적 존재가 문제를 철저히 생각하게 될 때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어떤 원리 혹은 기준 혹은 선이 틀림없이 있다. 그 선은 무엇인가? 다른 모든 것을 선하게 만드는 그 선 곧 최고선은 무엇인가?

지식이 최고선이라고 소크라테스는 대답한다. 소크라테스 윤리학의 중심 논제는 다음의 공식에 포함되어 있다: “지식은 덕이다.” 올바른 사유는 올바른 행동에 본질적이다. 배를 조정하거나 국가를 통치하기 위해서는 배의 구조와 기능 혹은 국가의 본질과 목적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처럼 사람이 덕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면, 자제와 용기와 정의와 애국심의 의미와 그것들의 대립자들을 알지 못한다면, 덕스러울 수 없다. 그러나 덕이 무엇인지 알면, 그는 덕스러워질 것이다.
지식은 덕의 필요충분조건이다. 지식 없이 덕은 불가능하며, 지식의 소유는 덕스러운 행동을 보장한다. “사람은 자발적으로 악하거나 비자발적으로 선하지 않다.” “사람은 악이나 자신이 악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자발적으로 따르지 않는다. 선보다 악을 좋아하는 것은 인간 본성에 속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이 두 악 사이에 선택해야 할 경우, 더 작은 악을 선택할 수 있을 때 더 큰 악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다음과 같은 반론이 제기된다. “우리는 더 나은 것을 알고 그것을 인정하지만 악을 따른다.”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선을 참으로 알면서 그것을 선택하기를 거부할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려 했을 것이다. 그에게는 옳고 그름에 대한 지식이 단순한 이론적 의견이 아니라 확고한 실천적 확신이며, 지성뿐만 아니라 의지의 문제이다.

소크라테스는 지식과 덕을 동일하게 보는 입장에서 수많은 다른 함축 의미를 연역해 낸다. 덕은 지식이므로, 따라서 덕은 하나이게 된다. 지식은 통일체, 진리의 조직적 체계이며, 따라서 여러 개의 덕은 다만 덕 자체의 아주 많은 상이한 형식에 불과하다. 더욱이 덕은 그 자체로 선할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유익하다. 모든 명예롭고 유익한 행동의 경향은, 삶을 고통 없고 즐겁게 만들려 한다. 그래서 명예로운 것은 또한 유익하고 선한 것이다. 덕과 참된 행복은 하나이다. 절제하거나 용감하거나 지혜롭거나 정의롭지 못한 사람은 행복할 수 없다. 소크라테스는 「변명」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노소를 막론하고 여러분 모두를 설득하여 자신의 인격이나 재산을 생각하지 말고 먼저 무엇보다 영혼의 가장 큰 진보에 관심을 가지도록 하려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습니다. 나는 덕이 돈에 의하여 주어지지 아니하고 덕에서 돈과 (공적이건 사적이건) 인간의 다른 모든 선이 나온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그는 재판에서 다음과 같이 최후의 말을 남긴다. “그래도 나는 그들[나를 비난하고 고소한 자들]에게 한 가지 부탁을 드리고자 합니다. 나의 아들들이 자랄 때, 오 나의 친구들이여, 여러분이 그들을 벌하여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그들이 덕보다 재산이나 다른 어떤 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처럼 보일 때, 내가 여러분을 괴롭게 만들었듯이 여러분이 그들을 괴롭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혹은 그들이 사실상 아무것도 아니면서 대단한 사람이 된 것처럼 행세하면, 그들이 마땅히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며 자신이 사실상 아무것도 아닌데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므로 내가 여러분을 질책했듯이 그들을 질책하십시오. 여러분이 이렇게 해 주신다면, 나와 나의 아들들은 여러분 손에서 마땅한 처벌을 받을 것입니다.”



소크라테스 학파들 - 메가라학파, 키레네학파, 견유학파의 공통과 차이


소크라테스는 형이상학 체계를 구축하거나 인식론이나 행위론을 제시하지 않았다. 스승이 닦은 토대 위에 건물을 세우는 것은 그의 제자들에게 남겨졌다. 어떤 이들은 소크라테스의 방법이 제시한 논리적 문제들을 연구 주제로 삼았고, 어떤 이들은 그의 윤리적 방법에 내재한 문제에 관심을 돌려 윤리 이론을 만들려고 했다. 에우클레이데스(기원전 450-374년)가 세운 메가라학파덕은 지식이라는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존재의 통일성에 대한 엘레아학파의 가르침을 결합시켰다. 덕의 개념은 사물의 영원한 본질을 형성한다. 다른 어떤 것도 질료든지, 운동이든지, 변화하는 감관의 세계든지 참된 존재를 갖고 있지 않다. 그래서 오직 하나의 덕만 있을 수 있으며, 따라서 외적인 선은 가치를 가질 수 없다. 에우클레이데스의 후계자들은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의 변증론적 측면을 과장했고, 제논과 엘레아학파와 소피스트들의 전통에 서서 온갖 미묘한 것과 미주알고주알 따지기를 즐거워했다.


소크라테스의 윤리학은 다면적이었고, 그 상이한 측면들은 종종 서로 상충되었다. 상충하는 측면 각각이 그의 추종자들에 의하여 과장되었다.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의 어떤 국면에 각각 근거를 둔 두 개의 중요한 윤리학파가 있었는데, 아리스티포스(기원전 약 435년에 출생)가 키레네에서 세운 키레네학파(Cyrenaic)와 안티스테네스(366년에 사망)가 아테네 퀴노사르게스의 경기장에서 설립한 견유학파(Cynic)가 있다.


키레네학파 지적 추구에서 파생되는 기쁨과 만족이라는 소크라테스의 열정주의적인 묘사를 붙잡았다. 그들에게 최고선(summum bonum)은 최대한의 쾌락 획득고통의 회피가 되었다. 키레네학파의 이론은 순전히 양적 쾌락주의였다. 이 이론은 고등한 쾌락과 열등한 쾌락을 구분하지 않고, 신체의 쾌락이든지 영혼의 쾌락이든지 상관없이 가장 강렬한 쾌락을 추구할 것을 옹호했다. 미숙한 쾌락주의는 그 안에 비관론의 씨앗을 갖고 있는 법이다. 고통보다 쾌락을 많이 얻는 것은 불가능하게 보이며, 쾌락의 배타적 추구는 권태와 좌절에 이른다. 이 학파의 비관론자 헤게시아스는, 심지어 고통 없는 상태라도 획득하는 인간은 다행이며, 대부분의 인간에게는 고통이 쾌락보다 많다고 지적했다. 이런 상황에서 자살은 유일한 탈출구처럼 보이며, 그래서 그는 “자살을 부추기는 자”가 되었다.

견유(犬儒) 학파는, 지식과 동일한 덕이 쾌락의 형식으로 오는 보상과 별개로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이라는 소크라테스의 입론을 과장했다. 따라서 덕스럽고 모든 필요에서 벗어나기를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의무이다. 필요로부터의 독립과 자유에 대한 강조는 소크라테스가 모범으로 보여준 자질들을 찬양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다른 사람의 견해에 대해 독립적이며 무관심했던 것이다. 덕과 의무의 윤리학은 그 주장자들을 극단적인 훈련과 절제와 자기 부정과 완전한 무소유에 이르게 했다. 다른 말로 하면 금욕주의에 이르게 했다. 또한 이 윤리학은 문명의 인공물을 거부하고 자연 상태로의 복귀를 옹호하는 데 이른다. 시노페의 디오게네스는 견유학파의 이처럼 급진적인 측면을 몸소 실천한 주창자이다.

두 개의 소크라테스주의적 윤리학파는 서로 대립되긴 하지만, 한 가지 중요한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개인의 구원을 추구했는데, 한편은 쾌락에서, 다른 편은 쾌락의 거부에서 추구했다. 두 학파는 후대 그리스 철학에 비슷하게 영향을 끼쳤다. 쾌락을 최고선으로 보는 키레네학파의 이론에피쿠로스학파가 채택하여 변경시켰고, 쾌락 이론을 거부하고 덕을 위한 덕이라는 이론을 옹호한 견유학파의 가르침은 스토아학파에 의하여 발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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