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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철학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과 철학: 형이상학, 우주론, 영혼, 인식론, 신학과 윤리학의 양적 이론 탐구

by 건강맨이야Ho 2023. 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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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적 이론의 관점을 통해 데모크리토스의 철학 이론을 알아본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은 우주의 모든 것이 원자라고 하는 작으며 불가분의 입자로 분해될 수 있다고 가정한다. 형이상학, 우주론, 영혼, 인식론, 신학, 윤리학에 대한 그의 견해는 모두 본질적으로 매우 양적인데, 이는 세상의 모든 것이 수학적으로 기술 가능 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철학에 대한 데모크리토스의 독특한 접근 방식과 그의 양적 이론이 현실의 본질과 경험에 대한 그의 생각에 어떻게 기여했는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 - 1. 원자는 단순하고 물리적으로 나뉠 수 없음 2.텅빈 공간의 실재가 운동 조건 3. 운동은 원자의 내재적 속성 4. 기계 법칙에 종속

데모크리토스는 기원전 460년 경에 트라키아의 해변에 있는 아브데라라는 상업 도시에 태어나, 370년에 죽었다. 그는 널리 여행을 하고, 물리학과 형이상학과 윤리학과 역사에 대하여 많은 책을 썼고, 수학자로서 명성이 자자했다. 그의 저술들은 비교적 작은 단편으로만 우리에게 전해져 내려온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어떤 것이 그의 저술이며 어떤 것이 레우키포스의 저술인지 확실하게 판단할 수 없는 입장이다. 하지만 현존하는 자료들의 도움을 받아, 우리는 원자론에 대한 아주 적절한 관념을 형성할 수 있다. 물론 저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문제는 의심스러운 상태에 있음에 틀림없다.
엠페도클레스와 아낙사고라스는 자연과학적 우주관을 위한 길을 닦았다. 이 견해는 원자론이라는 이름 아래 오늘날까지 과학에서 영향을 떨친다. 엠페도클레스와 아낙사고라스의 가르침은 몇몇 중요한 측면에서 개정이 필요했다. 그리고 원자론자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의 손에서 그들의 가르침은 개정되었다. 원자론자들은 실재의 원초적이며 변화 없는 소립자를 받아들이는 점에서 선배와 의견을 같이하지만, 엠페도클레스와 아낙사고라스가 귀속시킨 질적 속성을 거부하고
그것들이 사랑과 미움에 의하여 혹은 지성에 의하여 바깥으로부터 움직여진다는 것을 배격한다. 흙, 공기, 불, 물은 엠페도클레스가 주장했듯이 “만물의 뿌리”가 아니며, 아낙사고라스가 말했듯이 상이한 성질의 무수한 “씨”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사물들은 참된 요소가 아니라, 좀 더 단순한 단위, 비가시적이고 침투될 수 없고 분리될 수 없는 공간적 존재(entity)나 원자로 구성된다. 이 원자들은 형태와 무게와 크기에 따라 상이하다. 그리고 이 단위 혹은 원자들은 나름대로의 고유한 운동을 갖고 있다.


아낙사고라스의 질적 이론과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의 차이


(1) 아낙사고라스는 무제한적으로 많은, 질적으로 상이한 요소들을 상정했고, 데모크리토스는 모양이나 크기 등의 양적 측면에서만 서로 다른 무한히 많은 원자를 가정했다.


(2) 아낙사고라스의 요소들은 좀 더 작은 소립자로 쪼개지는 무한한 구분을 허용한 반면,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는 단순하고 물리적으로 나누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것을 설명한다는 측면에서 원자는 궁극적이며 부분들로 무한히 쪼개질 수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3) 아낙사고라스는 텅 빈 공간에 대하여 아무 말을 하지 않으며, 아마 실재가 어디서든 질적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반면에 데모크리토스는 텅 빈 공간의 실재를 원자의 운동 조건으로 주장했다.


(4) 아낙사고라스는 움직이는 요소와 구분되는 하나의 원리인 지성을 언급하여 운동을 설명했다. 데모크리토스는 운동을 원자들의 내재적인 속성으로 보았다.


(5) 마지막으로, 아낙사고라스의 지성은 의도적 혹은 목적론적 원리인 반면,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는 기계 법칙에 종속된다.



형이상학과 우주론 - 텅 빈 공간 존재, 비존재가 존재 / 만물은 충만 아니면 공허 / 불가분

원자론자들은 절대적 변화가 불가능하다는 데 엘레아학파와 의견을 같이한다. 실재는 본질적으로 항구적이며 파괴될 수 없고 변화될 수 없다. 동시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고 사물들이 끊임없는 운동 가운데 있음은 부정될 수 없다. 그런데 운동과 변화는 텅 빈 공간이 없이 혹은 파르메니데스가 비존재라고 불렀던 진공 없이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원자론자는, 비존재 혹은 텅 빈 공간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파르메니데스의 비존재가 실제로 존재하며, 그것이 원자들이 그 안에서 움직이는 텅 빈 공간이라고 확언하는 대담성을 갖고 있다.이 말은, 텅 빈 공간이 물질적인 것이라는 의미에서 실재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이 나름대로의 실재성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물체는 공간보다 실재적인 게 아니다. 한 사물은 물체가 아니면서 실재할 수 있다. 원자들과 그것들이 그 안에서 운동하는 텅 빈 공간은 원자론자들에게 유일한 실재들이다. 만물은 충만 아니면 공허이다. 존재 혹은 충만함과 비존재 혹은 공허함은 똑같이 실재한다. 즉 실재하는 것은 엘레아학파가 주장하듯이 지속적이며 분리되지 않을 경우 움직일 수 없는 존재가 아니라, 텅 빈 공간에 의하여 서로 분리된 무수한 존재들이다. 이 존재들 각각은 분리될 수 없고 침투될 수 없고 단순한 원자이다. 원자는 몇몇 현대인들이 파악하듯이 수학적인 점이나 세력 중심이 아니라 연장(延長)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원자는 연장되어 있기 때문에, 수학적으로 분리 불가능한 점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분리 불가능한 소립자이다. 즉 그것은 물리적으로 부분으로 쪼개지거나 나누어질 수 없다. 모든 원자는 질적으로 동일하다. 그것들은 흙이나 공기나 불이나 물이 아니며, 특정 종류의 씨가 아니다. 그것들은 단지 아주 작고 촘촘한 물리적 단위로서 모양과 크기와 무게와 배열과 위치에서 상이할 뿐이다. 그것들은 파생되는 게 아니며 파괴될 수 없고 변화될 수 없다. 그것들은 현재나 과거나 미래나 동일하다. 다른 말로 하면, 원자들은 더 이상 나누어질 수 없는 작은 부분으로 쪼개진 파르메니데스의 하나의 분리 불가능한 존재이다. 그리고 각 원자는 파르메니데스가 유일한 존재에 귀속시킨 영원성과 불변성과 분리 불가능성을 갖고 있다. 텅 빈 공간에 의하여 서로 분리된 이 원자들은 상이한 대상들을 형성하는 실재의 건축돌이다. 마치 희극과 비극이 동일한 알파벳을 사용하되 상이한 방식으로 구성되는 것과 같다. 모든 물체는 원자와 공간의 결합이다: 기원은 결합을 뜻하며, 파괴는 분리를 뜻한다. 물체를 형성하는 원자들이 이미 언급한 방식에서 다르기 때문에 물체는 상이하다. 물체들은 압력과 충격을 통한 직접적 접촉에 의해서만, 혹은 하나의 물체로부터 나와서 다른 물체를 강타하는 방출물에 의하여 서로에게 작용한다. 원자로 하여금 결합되고 분리되게 만드는 것은 그것들에 내재한 운동이다. 원자들의 운동은 냉혹한 기계 법칙에 의하여 지배된다: “근거 없이 발생하는 것은 없지만, 모든 것은 하나의 이유와 필연성 때문에 발생한다.” 원자의 고유한 운동은 원자와 달리 야기되지 않는다. 원자들은 결코 정지하지 않고 처음부터 움직여 왔다. 공간은 운동의 원인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운동은 각 원자의 고유한 속성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원자들의 상이한 많은 모양 때문에, 어떤 원자는 갈고리를, 어떤 원자는 구멍을, 어떤 것은 홈을, 어떤 것은 혹을, 어떤 것은 함몰을 갖고서 서로 얽히고설킨다. 원자들의 거대한 조합으로 구성되는 물리적 대상들의 견고함과 단단함은 이런 상호 결합 때문이다.
우주적 진화는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우주는 다양한 모양과 크기와 운동의 무수한 원자로 구성되며, 상이한 방향으로 서로 충돌하며 충격의 결과로 소용돌이를 형성한다. 이 소용돌이 운동은 비슷한 모양과 크기의 원자들을 결합하고, 그래서 불과 공기와 흙과 물과 같은 복합 사물을 발생시킨다. 소용돌이 운동은 더욱 확대되어, 다양한 세계들이 이런 식으로 산출되며 각각의 체계는 하나의 중심을 갖고서 하나의 구체를 형성한다. 어떤 체계는 태양이나 달이 없고, 어떤 체계는 우리 태양계보다 크고 많은 행성을 갖고 있다. 지구는 그처럼 창조된 물체 가운데 하나이다. 습한 흙 혹은 점액질로부터 생명이 발생했다. 전체의 살아 있는 유기체 주변에 퍼져 있는 불타는 원자들은, 살아 있는 몸의 열기를 설명한다. 그리고 특별히 그것들은 인간 영혼에 가득 차 있다.


영혼학과 인식론 - 영혼은 원자로 구성 / 이성은 영혼의 최고 기능


영혼은 가장 훌륭하고 가장 원만하고 가장 민첩하고 불타는 원자로 구성된다. 이 원자들은 몸 전체에 흩어져 있으며 다른 두 원자 사이에는 항상 하나의 영혼-원자가 있다. 몸의 운동을 산출한다. 몸의 어떤 기관은 특정한 정신적 기능의 좌소이다:
뇌는 사유의 좌소이며, 심장은 분노의 좌소이며, 간은 욕망의 좌소이다. 살아 있건 아니건 모든 대상이 주변의 세력의 압력에 반발하는 것은 그 대상 안에 그런 영혼이 있다는 것에 의하여 설명된다. 우리는 영혼-원자를 들이마시고 내쉰다. 그리고 생명은 이런 과정이 계속되는 한에서만 존재한다. 죽을 때, 영혼-원자는 흩어진다. 영혼의 그릇이 부서질 때, 영혼은 흩어져 버린다. 여기 유물론적 기초에 입각한 생리학적 심리학의 조잡한 출발이 있다. 감각 지각은 파악된 물체와 닮은 발산 혹은 상 혹은 형태의 작용에 의하여 영혼에 산출된 변화로 설명된다. 모든 물체는 중간의 공기를 통하여 전달되는 상을 투사하고 마침내 감관에 충돌한다. 한 대상이 내던진 상은 그 대상과 이웃한 입자들의 배열을 비슷하게 바꾼다. 이 입자들은 그 대상과 바로 인접한 대상을 바꾸며, 그처럼 방출이 감관과 영혼을 형성하는 원자에 도달할 때까지 그렇게 한다. 만일 대상들에게서 나오는 상 혹은 유출물이 전달 과정에서 서로를 방해하면, 환영이 생긴다. 방해 없이 그것들이 전달되면, 상이나 유출물이 직접 감관을 때리고 마침내 영혼을 때리면, 참된 지식이 생긴다. 비슷한 것이 비슷한 것을 지각한다.


지각은 하나의 물체에서 방출하는 상들이 감관에 의하여 투사한 상들과 비슷할 때에만 가능하다. 도처의 대상들로부터 방출되는 그런 상들을 가지고 데모크리토스는 꿈, 예언적 이상, 신에 대한 신념을 설명한다. 우리가 상이한 물체에 귀속시키는 감각적 성질(색, 소리, 맛, 냄새 등)은 사물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원자들의 조합이 우리의 감관에 미친 결과일 따름이다. 원자들은 우리가 이미 언급한, 침투 불가능성, 모양, 크기 외에 다른 성질을 갖고 있지 않다. 그래서 감각 지각은 사물에 대한 참된 지식을 산출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물들이 어떻게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는가를 가리켜 보여줄 따름이다.
그리스 원자론자들은, 우리가 근대철학에서 만나게 될 일차 성질(침투 불가능성, 모양 등)과 이차 성질(색, 소리, 냄새 등)의 구분을 미리 보여주었다. 우리는 원자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생각할 수 있다. 감각 지각은 모호한 지식이다. 물론 우리의 감각 지각과 현상을 초월하며 원자에 도달하는 사유가 유일하게 진정한 지식이다.


데모크리토스는 초기의 모든 그리스 철학자들처럼 합리론자이다. 하지만 합리적 사유는 감각 지각에 독립되어 있지 않다.
참으로 이성 즉 “참된 인식 방법”은 감각 지각이 끝나는 데서 시작한다. 감관은 대상의 조잡한 측면들만 드러내 보인다. 그리고 “훨씬 훌륭한 것에 대한 탐구가 시행되어야 할 때” 이성은 감각 지식을 초월해야 한다. 이성은 영혼의 최고 기능이다. 참으로 데모크리토스에게서 영혼과 이성은 동일하다.


신학과 윤리학 - 신들도 존재하며 원자로 구성, 소멸, 높은 이성 소유, 두려운 존재 아님 / 삶의 목적은 내적 행복, 절제와 삶의 균형, 시기와 질투의 해로움


신들도 존재하며 원자로 구성된다. 신들은 인간처럼 죽어야 할 운명을 갖고 있다. 물론 오래 살긴 한다. 신들은 인간보다 강하며, 높은 수준의 이성을 소유한다. 그들은 인간이 꿈이나 아마도 다른 방법으로 인식할 수 있는 존재이지만, 인간사에 개입하지 않으며 따라서 두려워하거나 비위를 맞출 필요는 없는 존재이다. 다른 모든 사물과 같이 신들은 원자 운동의 비인격적 법칙에 종속된다.

우리가 데모크리토스의 인식론에서 지적했던 감각에 대한 이성의 우월성은 윤리학의 영역에 확대된다. 모든 행동의 목적은 안녕이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안녕은 단지 감관의 쾌락이 아니라 이성적 기능의 발휘에 동반되는 만족이다. 데모크리토스가 썼다고 하는 윤리학적 단편에서 우리는 세련된 쾌락주의 윤리학의 개요를 추적할 수 있다. 여기서 처음으로 만나는 유물론과 쾌락주의의 결합은 의심할 나위 없이 이 두 이론의 자연적 유사성을 반영한다. 쾌락은, 유물론적이며 자연주의적인 철학과 조화를 잘 이루는 양적이며 감각적 성격을 갖는다.


데모크리토스는 삶의 참된 목적이 행복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행복을, 영혼의 평정과 조화와 대담함에 달려 있는 만족 혹은 쾌락의 내적 상태로 서술한다. 이 내적 행복은 재산이나 물질적 재화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니고 몸의 쾌락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짧고, 고통을 산출하고, 반복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적 행복은 쾌락에서의 절제와 삶의 균형에 달려 있다. 우리는 덜 욕구할수록 덜 실망하게 될 것이다. 이 목표를 달성하는 최선의 방법은 아름다운 행동에 대한 반성과 명상을 통하여 정신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모든 덕목은 최고선인 행복에 기여하는 한에서 가치롭다. 덕목 가운데 으뜸은 정의와 박애이다. 시기와 질투와 모진 마음은 부조화를 일으키고 모든 사람에게 해롭다.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은 잘못된 일을 행하는 것을 단지 자제하는 게 아니다. 잘못된 것을 하려는 마음을 먹지 말아야 한다.
“당신은 참되게 말하는 사람과 거짓되게 말하는 사람을 구별하되, 행위로만 아니라 그의 욕구로도 구별할 수 있다.”
“올바른 마음을 가진 사람은 항상 정의롭고 합법적인 행동을 하려고 하는데, 그는 밤이나 낮이나 즐거우며, 강인하며, 근심에서 벗어난다.” 우리는 그 상태에 이바지해야 한다. 왜냐하면 “잘 다스려지는 국가가 우리의 가장 큰 보호 수단이기” 때문이다. “국가가 건전한 상태에 있을 때, 모든 것이 형통하다. 국가가 부패할 때, 모든 것이 파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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