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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철학

엘레아학파 : 존재가 유일한 현실, 변화와 움직임은 단지 환상 - 크세노파네스, 파르메니데스, 제논 (아킬레스와 거북의 역설), 멜리소스

by 건강맨이야Ho 2023. 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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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아학파는 변화와 운동이란 생각할 수 없는 것이며, 사물의 원리는 항구적이며 움직이지 않고 결코 변하지 않는 것임에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이 학파는 학파의 창시자인 파르메니데스의 고향, 남부 이탈리아의 엘레아 읍에서 그 이름을 땄다. "존재"가 유일한 현실이며 변화와 움직임은 단지 환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우주가 하나의 불변하는 실체이며 모든 명백한 다양성과 변화는 인간의 지각에 의해 만들어진 환상일 뿐이라고 믿었다. 크세노파네스 그는 엘레아주의 철학의 선구자간주될 만하다. 신학적 형태로 이 철학의 근본 통찰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엘레아학파를 창설한 공로를 인정받기 힘들다. 왜냐하면 그는 신의 항구성이라는 입론을 개진하지만 항구적인 신(神)과 나란히 변화하는 세계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파르메니데스 이 철학의 진짜 창시자인데, 항구성의 이론을 존재론의 완벽한 체계로 발전시키기 때문이다. 제논멜리소스는 이 이론의 옹호자이다. 그들은 이 학파의 변증가들이다.

크세노파네스 - 그리스 종교 비판, 영원불변의 유일한 신 (일신론), 다신론 공격, 신의 통일성과 변화불가능성, 신인동형론 비판

크세노파네스(기원전 570-480년)는 시인이며 회의론자이며 신학자로서 소아시아 콜로폰에서 남부 이탈리아로 이주했다. 이곳에서 그는 음유 시인으로서 이곳저곳을 배회했다. 그는 철학자라기보다 풍자 시인이었다. 그는 그리스의 예절과 신념을 비판했다. 그의 주된 비판은 종교의 신인동형론과 다신론에 대한 것이었다. 그의 종교적 태도는 회의론적이다. 그러나 그의 회의론은 명확하게 정식화되고 추론된 철학적 회의론이 아니라 지성의 기질이며 태도에 해당한다. 아마 그는 글을 조금밖에 쓰지 않았고 현재 그의 저술은 단편으로만 남아 있다. 크세노파네스에게서 우리는 그리스 사상에서 처음으로 회의론의 흔적을 식별한다. 신들과 자연의 본질에 관한 어떤 지식들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신학적 추정을 개진할 자유가 있다고 주장했으며, 이 사색이 진리에 접근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크세노파네스는 철학자라기보다 사변적 신학자이다. 그는 피타고라스처럼, 6세기 대중 종교 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당대의 만연한 다신론과 그 신인동형론을 공격하며, 신의 통일성과 변화불가능성을 선언한다. “그러나 죽을 인생은 신들이 자기들처럼 태어나며 자기들처럼 지각을 갖고 있고 목소리와 음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그러면 소나 사자가 손을 갖고 있어서 사람처럼 손으로 그림을 그리고 예술 작품을 만들 수 있다면, 말은 신들의 형상을 말처럼, 소는 소처럼 그릴 것이다. 각자는 각자의 형상에 따라 신체를 가진 신들을 묘사할 것이다.” “그처럼 이집트인들은 자기네 신들을 검고 들창코를 가진 존재로 만든다. 트라키아인들은 자기네 신들을 붉은 머리카락과 푸른 눈을 가진 존재로 만든다.”


신은 하나(유일신)이며, 신체나 지성을 가진 인생과 다르다. 그는 고생하지 않고 자신의 지성의 사유로 만물을 통치한다. 그는 한 장소에 거하며 결코 움직이지 않는다. 그는 만물을 굽어보고 생각하고 듣는다. 즉 자신의 모든 부분으로 그렇게 한다. 신은 영원하다. 처음이나 끝이 없다. 그는 자기 옆에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에서 제한되지 않으며, 자신이 하나의 영역, 하나의 완전한 형식이며 형상 없는 무한이 아니라는 점에서 제한된다. 그는 전체로서 움직일 수 없다. 왜냐하면 운동은 존재의 통일성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부분들에는 운동이나 변화가 있다. 크세노파네스는 광범위한 존재론적 우주론적 가설을 정식화하지 않았지만, 몇몇 자연과학적 이론을 제시했다. 조가비와 돌에 남아 있는 해산물의 흔적을 증거로 삼아, 인간을 포함하여 존재하고 성장하는 만물이 땅과 물에서 나왔다고 추론한다. 한때 땅은 바다와 섞여 있었지만,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땅이 습기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언젠가 땅은 다시 바다로 가라앉아 다시 진흙이 되고 인류는 새로 시작해야 될 것이다. 그는 태양과 별을, 매일 꺼졌다가 다시 불붙는 구름으로 본다. 별들이 무인지역(無人地域)을 넘어갈 때 소멸된다는 흥미로운 의견을 그는 제시한다.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론 - 이성적 변증론적 관념론자, 존재와 사유는 하나, 감각의 세계는 착각, 실재와 이성은 일치

파르메니데스는 엘레아학파의 형이상학자였다. 그는 만물이 변하며, 불이 물이 되고 물이 흙이 되고 흙이 불이 되며, 사물이 처음에 존재하다가 나중에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가르침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이렇게 묻는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어떻게 한 사물이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가? 어떻게 그런 모순을 생각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한 사물이 그 성질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 어떻게 하나의 성질이 다른 성질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어떤 것이 존재하고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으며 어떤 것이 무로부터 나올 수 있으며 어떤 것이 무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혹은 다른 식으로 논거를 펼치면, 만일 존재가 생성한다면, 존재는 비존재(非存在)로부터 나오거나 존재로부터 나와야 한다.
만일 비존재로부터 나온다면, 무로부터 나왔으며, 그리고 이는 불가능하다. 만일 존재로부터 나온다면, 자신으로부터 나왔다. 그리고 이는 존재가 자신과 동일하며 따라서 언제나 있어 왔다고 말하는 것과 진배없다.
그러므로 존재로부터만 존재가 나올 수 있으며, 무가 다른 어떤 것이 될 수 없으며,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언제나 존재했고 앞으로 존재할 것이며, 모든 것은 지금과 같이 남을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오직 하나의 영원하고 파생적이지 않고 변할 수 없는 존재만 있을 수 있다. 존재는 모두 동일하고 그 안에는 존재 외에 있을 수 없으므로, 존재는 지속적이며 분리 불가능함에 틀림없다. 존재 안에는 단절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만일 단절이 실재하다면 그것 자체가 존재이며 그래서 존재는 결국 지속적이다. 반면에 단절이 실재하지 않으면, 그것은 비존재이며 따라서 존재는 지속적이다. 더욱이 존재는 움직일 수 없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존재가 움직일 수 있는 비존재(텅 빈 공간)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존재와 사유(思惟)는 하나이다. 왜냐하면 사유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존재할 수 없는 것은, 즉 비존재는 사유될 수 없다. 즉 사유와 존재는 동일하다. 사유되는 모든 것은 존재를 갖고 있다. 그래서 파르메니데스는 이성적 혹은 변증론적 관념론자라고 특징지을 수 있다. 또한 파르메니데스는, 실재가 지성을 부여받았다는 의미에서 존재와 사유가 하나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유심론적 관념론을 그가 주장했다고 할 충분한 증거는 거의 없다. 존재 혹은 실재는 동질적이며, 지속적이며, 무규정적인 덩어리이다. 파르메니데스의 미적인 상상력은 그 덩어리를 하나의 구체로 묘사한다. 이 덩어리는 이성을 부여받았고, 영원하고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모든 변화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감각의 세계는 착각이다. 우리가 감각으로 파악하는 것을 참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존재와 비존재를 혼동하는 것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이성에 대한 굳건한 신념을 보여준다. 실재는 이성과 일치하고, 사유와 모순되는 것은 실재할 수 없다. “진리”의 이론 외에도, 파르메니데스는 감각 지각에 근거한 “착각”의 이론을 제시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존재와 비존재가 있고 따라서 운동과 변화가 있다. 세계는 두 원리, 따뜻하고 밝은 요소와 차갑고 어두운 요소의 혼합, 결합이다. 유기체적 존재는 점액질에서 나왔다. 인간의 사유는 그의 신체에 있는 요소들의 혼합에 의존한다. 따뜻한 요소는 세계 내에서 온기와 빛을 파악하고, 다른 요소는 정반대의 것을 파악한다. 파르메니데스는 자신의 “참된” 가르침으로, 논리적 사유에 따를 경우 우리가 세계를 하나의 통일체로, 변화할 수 없고 움직일 수 없는 것으로 파악하지 않을 수 없음을 보여준다. 반면에 감각 지각은 다원성과 변화의 세계를 우리에게 계시한다. 이는 현상과 억견의 세계이다.
그런 세계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으며 혹은 그런 세계를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지를 그는 우리에게 말하지 않는다. 항구성에 대한 착각을 변화 과정의 각 단계에서 유지되는 일정한 균형으로 설명했던 헤라클레이토스의 철학에서 상당히 그럴듯했던 사유와 착각의 구분은 파르메니데스의 구도와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동질적이며 지속적인 존재에서 오류와 착각은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 아마 파르메니데스에게서 배울 가장 중요한 교훈은, 추상적 사유와 언어의 대상을 본체화하고 실체화하는 것이란 감각 세계의 질적 차이를 지워버리는 것이라는 소극적인 교훈일 것이다. 러셀은 「서양철학사」(A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에서 파르메니데스가 언어에서 실재로 논증해 들어가는 언어학적 오류의 희생자였다고 주장했다. 파르메니데스의 추론에 대하여 그는 이렇게 말한다:파르메니데스의 추론은 철학에서 사유와 언어로부터 전체 세계로의 논증을 보여주는 첫 번째 예이다. 물론 이는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진리를 담고 있는지를 알아볼 만하다. 전체 논증은 언어로부터 형이상학적 결론을 끌어내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를 그리고 이런 유의
오류적 논증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이란 대부분의 형이상학자들이 시행했던 것보다 언어의 논리적·심리학적 연구를 가일층 밀고 나가는 것임을 보여준다.


제논의 변증법 - 다원성 반박, 운동의 역설 - 아킬레스와 거북의 역설


제논(기원전 490-430년 경)은 엘레아의 정치가이며 파르메니데스의 제자로서 엘레아학파의 이론을 입증하되, 그 반론들의 부조리성을 지적함으로써 입증하려 했다. 그는, 만일 우리가 다원성과 운동을 가정할 경우 모순에 빠진다고 주장했다.
그런 개념들은 자기모순적이다. 그래서 그것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는 다음과 같이 다원성반박한다. 만일 존재의 전체가 다원성이라면, 그것은 많은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전체는 무한히 작거나 무한히 큰 것으로 입증될 수 있다.
무한히 작다고 함은, 이 전체가 무한히 작은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고 (어떤 부분은 아무리 작더라도 언제나 더욱 쪼개질 수 있다) 그런 부분들의 합이란 무한히 작을 것이기 때문이다. 무한히 크다고 함은, 어떤 유한한 부분에든지 언제나 무한한 수의 다른 부분들을 우리가 언제나 첨가할 수 있고 (아무리 크다 해도 존재들의 총체를 넘어서 더 많은 존재가 항상 있다) 전체는 무한히 클 것이다. 하나의 동일한 전체가 무한히 작으면서 무한히 크다고 말하는 것은 부조리하다. 그래서 우리는 시초에 제기한 다원성의 가정을 전적으로 배격해야 한다.


운동과 공간은 동일한 이유들 때문에 불가능하다. 우리가 만일 모든 존재가 공간 안에 있다고 말한다면, 이 공간은 하나의 공간 안에 있으며, 그와 같은 관계는 무한히 존재할 것이라고 가정해야 한다. 비슷하게, 한 물체가 공간을 관통하여 운동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어떤 공간을 관통하기 위하여 먼저 그 공간의 절반을 관통했어야 한다. 이 절반의 공간을 관통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절반의 절반을 관통했어야 한다. 그와 같이 무한히 진행되어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그 물체는 결코 어디에도 도달할 수 없다. 그래서 운동은 불가능하다.

운동의 역설 - 아킬레스와 거북의 역설

제논은 운동의 불가능성에 대한 네 가지 유명한 증명을 개진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재현한 이것을 흔히들 제논의 운동의 역설이라고 언급한다. 이 논증들 가운데 첫 번째는 하나의 위치에서 목표로 운동하는 것이 불가능함으로 증명한다.
왜냐하면 출발점과 목표 사이의 무한한 수의 점을 관통해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아킬레스와 거북의 역설은 움직이는 목표를 통과할 수 없음을 증명한다. 아킬레스는 훨씬 속도가 빠르지만 거북을 따라잡을 수 없는데, 아킬레스가 시초의 출발점에서 거북의 맨 처음 출발점까지 움직이고 있는 동안 거북이 어떤 거리를 움직였고 이후의 계속되는 간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 논증(움직이는 화살의 역설)은, 과녁을 향하여 날아가는 듯이 보이는 화살이 어떤 순간에 공간의 한 정해진 위치에 있음을 증명한다. 즉 화살은 휴식 상태이거나 운동 정지 상태에 있다. 그런데 정지의 종합은 운동을 산출할 수 없다. 이 세 가지 논증은 모두, 공간과 시간이 분리된 순간과 점으로 구성된다는 의심스러운 가설에 근거한다. 제논은 또한 네 번째 논증을 개진하는데, 이는 관찰된 운동의 상대성에 호소한다. 움직이는 대상이 다양한 속도로 정지의 위치에서 관찰되든지 운동의 위치에서 관찰되든지 상관없이, 감관의 변하기 쉽고 상충하는 증거는 운동의 가능성을 무너뜨린다. 이 논증은 다른 세 개의 논증과 전제가 다르지만, 똑같이 흥미롭다. 확실히 제논의 역설은 해소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지속과 실재에 대한 수학적·물리적·혹은 철학적 이론들이라는 맥락에서만 가능하다.


사모스의 멜리소스 - 존재는 시간적, 공간적으로 무한


성공한 해군 제독인 그는 엘레아주 의의 이론에 대한 증명을 시도했다. 파르메니데스와 마찬가지로 그는 존재가 하나라고 주장했다. 게다가 존재는 발생했을 리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될 경우 존재가 있기 전에 비존재가 있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존재로부터는 존재가 생길 수 없다. 그래서 존재는 시간적으로 무한하다. 혹은 영원하다. 멜리소스는, 존재가 공간에서도 무한하다고 확언했다. 존재의 공간적 무한성에 대한 그의 이론은, 존재란 유한한 구체라고 하는 파르메니데스의 가르침과 상충할 뿐만 아니라, 무한자를 무의미하고 생각할 수 없는 것으로 배격하던 그리스 사상의 전반적 경향과 상충한다. 멜리소스에 따르면, 텅 빈 공간이나 비존재는 없고, 따라서 공간을 요구하는 운동은 불가능하다. 만일 복수성이나 운동이 없다면, 분리나 결합이 있을 수 없고, 변화도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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