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고 주장한 그리스 최초의 철학자였다. 그는 정치가, 수학자, 천문학자로 유명했다. 아낙시만드로스는 기원전 611년에 밀레토스에서 태어나 기원전 547년 혹은 546년에 죽었다. 그는 탈레스의 제자로 언급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동료 시민으로서 탈레스의 견해를 잘 알았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겠다. 우리는 그가 천문학과 지리학과 우주론에 관심을 갖고 있었고 지구 및 천체도를 만들었으며, 해시계를 그리스에 소개했다는 것을 안다. 현재 단편으로만 남아 있는 그의 「자연론」이라는 논문은, 우리가 아는 한 그리스에서 기록된 최초의 철학서이며 그리스어로 된 최초의 산문을 지었다. 아낙시메네스는 모든 변화를 운동으로 환원하고자 했다.
탈레스 - 만물의 근원은 물
탈레스의 중요성은 철학적 물음을 정면으로 제기하고 신화적 존재를 언급하지 않으면서 그 물음에 답했다는 데 있다. 그는, 생명에 필요한 양분과 열과 씨가 습기를 갖고 있다는 사실 위에 자신의 결론을 놓고, 물이 원초적 재료라고 선언했다. 탈레스는 물을 자신의 일차적 실체로 선택할 때, 오케아노스(Oceanos)와 테티스(Tethys)의 신화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이 주장은 그리스 철학이 그리스의 신화와 종교에서 출현했다는 견해에서 상당한 신빙성을 갖는다. 물은 고체와 액체와 증기의 형태를 취할 능력을 갖고 있고, 그래서 사람이 볼 때 변형의 과정 중에 있는 것 같다. 물은 태양열에 증기가 되는데, 탈레스는 이것을 물이 불로 변화하는 것으로 즉각 해석한다. 물은 비로 다시 떨어져 대지에 흡수된다. 이는 물이 흙으로 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물은 생명에 필수적이다. 존 버넷(John Burnet)은 탈레스가 물을 선택한 이유들을 조사할 때, 생물학적 이유들이 후대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이유들을 도외시한다. 물로부터 만물이 나온다. 그는 하나의 실체가 다른 실체로 변하는 것을 경험의 사실로 받아들였고 자신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 변하는가를 우리에게 말하지 않는다. 분명히 그는 초기의 모든 그리스 철학자들처럼 자연을 살아 있는 것으로, 움직이고 활동하고 변화하는 것으로 보았다. 적어도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에게 그렇게 이야기한다. 우리가 히폴리투스의 말을 믿을 수 있다면, 탈레스는 만물이 물에서 나올 뿐만 아니라 물로 돌아간다고 본다. 아마 탈레스는 물을 일종의 점액으로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점액은 고체와 액체, 생물의 기원을 모두 가장 만족스럽게 설명해 주었을 것이다. 탈레스 철학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대개가 추측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탈레스의 견해들은 셋으로 환원 가능하다: (1) 만물은 신들로 충만하다; (2) 땅은 물 위에 떠다니는 평평한 원반이다; (3) 물은 만물의 질료인이다.
아낙시만드로스 - 만물은 물, 불, 공기, 흙으로 구성
아낙시만드로스는 다음과 같이 추론했다: 사물의 본질 혹은 원리는 탈레스가 주장하듯이 물이 아니다. 왜냐하면 물 자체가 설명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영원하고, 사멸 불가능한 실체로 파악되는 무한정자 혹은 무한자이다. 만물은 그것으로부터 만들어지고 그것으로 돌아간다. 아낙시만드로스가 말하는 무한정자는 한계가 없고 공간을 채우고 생기적 덩어리였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는 이 덩어리의 본질을 구체적으로 규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모든 성질이 이 본질로부터 나온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만물은 물, 불, 공기, 흙으로 구성된다. 아낙시만드로스의 무한정자에 대한 상충하는 많은 해석들 가운데서, 버넷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열거한다. (1) 무한정자는 그것으로부터 사물들이 분리에 의하여 생성되어 나오는 혼합물이다. 이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제일 원리를 엠페도클레스와 아낙사고라스의 혼합과 대립시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다소 의문스러운 구절에 근거한 해석이다. (2) 무한정자는 무규정적이며 불확정적이며 질적으로 무차별적인 질료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무규정적이며 가능적인 질료”를 미리 말해 주는 것이다. (3) 무한정자는 관찰 가능한 요소들 사이에서 가령 공기와 물 혹은 공기와 불 사이에서 매개하는 것이다. 두 번째 해석은 모호하긴 하지만 — 어쩌면 그것 때문에 — 상당히 그럴듯하다. 버넷이 주장하듯이, 아마 이 견해들의 조화가 가능하다. 그는 이렇게 순진하게 추론한다: 무한정자는 무한하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범위에서 무한정하다. 그렇지 않다면 사물의 창조에서 소진되었을 미분화된 질료라는 이 거대한 덩어리로부터, 상이한 실체들이 질료의 영원한 운동 결과로 분리된다. 첫째로, 뜨거운 것과 찬 것이 분리되며, 뜨거운 것은 화구(火球)로서 차가운 것을 둘러싼다. 불꽃의 열이 차가운 것을 습기로 변하게 하고 그런 다음 공기로 변하게 한다. 공기는 불의 영역을 확장시키고 해체시켜 바퀴 모양의 고리가 되게 한다. 고리는 플루트의 구멍처럼 입구가 있고, 그것을 통하여 불이 흘러나온다. 이 구멍들은 천체이며, 이 천체들을 둘러싸는 대기는 땅을 중심으로 이 천체들을 운동하게 한다. 태양은 하늘에서 가장 멀리 있는 물체이며, 그 다음으로는 달이 있고, 그다음에 항성과 행성이 있다. 이 체계의 중심에 있는 지구는 원통 모양의 물체이다. 지구가 어떤 것에 의하여 지탱되지 않고 다른 천체들에 의하여 균형을 유지하는 원통이라고 보는 이 개념은, 세계 안에 절대적인 성쇠가 없다는 흐릿한 인식을 담고 있다. 참으로 아낙시만드로스의 우주론은 공상적인 부분이 많긴 하지만, 현대 천문학에서 말하는 우주의 몇몇 특징을 미리 보여준다.
최초의 생물은 습한 요소에서 나왔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피조물들 가운데 몇몇은 물에서 나와 육지의 마른 곳으로 들어갔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했다. 사람은 다른 모든 동물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물고기였다. 생물의 기원에 관한 아낙시만드로스의 사변은 그의 우주론적 사변과 마찬가지로 놀라울 정도로 현대적인 분위기를 갖고 있다. 만물은 그것이 출현한 시원적 덩어리로 다시 돌아가야 하며, 새롭게 무한히 산출될 뿐이다. 이는 초기 사상에 만연한 세계 변화의 이론이다. 주기적 순환이라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이론에 따르면, 무수한 세계는 아마 시순(時順)적으로 연속하지, 공존하지 않는다. 사물의 창조는, 사물들이 현재의 존재가 됨으로써 무한적인 것을 강탈하는 부정의(不正義)이며, 정의는 사물이 무한적인 것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시원적 실체로부터의 분리와 그것으로의 귀환이라는 영원하고 주기적인 순환이 존재한다. (이 우주론적 가설은 참으로 현대 주기적 역사 이론의 원초적 출처이다. 이 역사 이론은 역사가 상이한 문화적 매체로 자신을 반복한다는 견해이다. 물론 아낙시만드로스의 가설과 이 역사 이론은 차이점이 있다.) 아낙시만드로스의 사유는 탈레스의 사유를 넘어선다. 첫째로 탈레스가 하나의 원리로 수립하는 요소를 파생적인 것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에서, 둘째로 생성 과정의 단계들을 서술하려는 시도에서 그렇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질료의 파멸 불가능성이라는 개념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무한정자에 성질을 부여하지 않는 그의 태도는, 선배의 구체적이며 감각적으로 파악되는 실체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보다 더 추상적인 사고방식의 경향을 보인다. 이 말은 아낙시만드로스의 무한정자가 추상적 무한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구체적이며 무규정적인 실체이다. 그러나 추상을 향한 경향이 그의 사유에 명백하게 나타난다. 우리는 무한정자를 추상적 혹은 논리적 측면으로 해석하는 (헤겔이 부추기는)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이는 수학자의 추상적 무한성이 아니다. 그것은 무한하고 구체적인 덩어리이다. 첼러(Zeller)가 표현했듯이, “무한정자는 술어이지 주어가 아니다.” 무한정자는 구체적이며 추상적이지 않지만, 감관이 관찰 가능한 구체적 사물들과 구별된다. 물과 같이 관찰 가능한 요소와 구별되는 하나의 설명 원리를 채택한 것은 철학적 정교화에서 진보이다. 아낙시만드로스의 독창적인 생물학적 이론은 아마 가장 최초의 진화론으로 언급될 것이다. 반면에 그의 천체 이론은 후속되는 천문학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아낙시메네스 - 사물의 제일 원리는 공기, 우주적 공기는 무한 확장
역시 밀레토스의 시민인 아낙시메네스(기원전 588-524)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제자였다고 한다. 그는 이오니아 방언으로 산문 작품을 썼고, 오늘날은 단편만이 남아 있다. 아낙시메네스에 따르면, 사물들의 제일 원리 혹은 근본 실체는, 스승이 주장했듯이 하나이며 무한하다. 그러나 그것은 무규정적인 게 아니라, 공기나 증기나 안개이다. 아마 공기를 제일 원리로 선택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공기가 건조하며 차가우며 따라서 따뜻하고 건조한 요소인 불과 차갑고 습한 요소인 물을 매개하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공기는 우리의 신체에서 생명의 원리이다: 호흡이 끊어지면 유기체는 죽는다. 공기 혹은 호흡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요소이듯이, 우주의 원리이기도 하다. 아낙시메네스는 세계를 호흡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공기인 인간의 영혼이 인간을 붙들듯이, 호흡 혹은 공기는 전 세계를 둘러싸고 유지한다. 우주적 공기는 살아 있고 공간을 통하여 무한히 확장된다. 선배 아낙시만드로스를 넘어서는 아낙시메네스의 중요한 발전은 일차적 실체로부터 관찰 가능한 요소들의 출현을 설명하는 농후화와 희박화의 이론이다. 공기를 통하여 만물은 농후화와 희박화의 과정에 의하여 생긴다. 공기가 희박해지면 불이 된다. 농후 화하면 바람, 구름, 물, 흙, 돌이 된다. 일차적 실체로부터 요소들의 출현을 설명하는 농후화와 희박화에 대한 아낙시메네스의 이론은 참으로 과학적인 설명 양식을 향한 일보 진전으로서 중요하다. 농후화와 희박화는 순전히 양적 개념이다. 전자는 주어진 부피를 차지하는 질료의 양에서 증가를, 후자는 감소를 말한다. 그래서 그의 이론은 질적 차이를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에서 아주 분명하게 선언되는 양적 용어로 환언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장족의 진전이다. 혹은 아낙시메네스의 진보를 이렇게 달리 표현할 수 있다: 그는 모든 변화를 운동으로 환원하려 했다. 모든 변화는 운동에 의하여 산출되며, 운동은 영원하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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